색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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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히히, 으히히히……’

헉, 그는 고개를 쳐들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온 몸에 냉기가 흘렀다. 마치 방 전체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것일까? 또다시 악몽을 꾸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공포는 매한가지였다. 식은땀에 펑 젖은 등줄기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목소리 - 기괴한 그 목소리가 벌써 몇 주째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시선으로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엎드려 있던 책상은 졸음에 빠져들기 직전과 똑같았다. 하드커버가 씌워진 두꺼운 법전 몇 권과 난잡한 필기가 가득한 노트들이 백열 스탠드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비슷한 책과 공책들이 벽돌 무더기처럼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이번에도 꿈이었어, 핑 도는 이마를 감싸쥔 그가 뇌까렸다. 그때였다.

‘때가 왔다.’

으악, 다시금 비명이 튀어나왔다.

“누, 누구야!”

화들짝 사방을 훑었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방 안이 농구장만큼이나 커다랗게 보였다. 아무도 없었다.

‘때가 왔다.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낄낄낄낄……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오싹한 조소를 흘렸다. 그 목소리였다. 지난 수 주일 동안 그를 시달리게 만든 바로 그 환청이었다.

자그마한 배가 폭이 채 몇 백 미터도 되지 않을 포구를 천천히 벗어났다. 김형진은 뱃전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 일곱 시간 가까이 차 속에서 시달린 두 다리가 뻐근하게 저려 왔으나 주변 풍경만큼은 더없이 한가로웠다. 드문드문 섬들이 이어진 전형적인 우리나라 남해안의 모습이었다.

야트막한 구름이 깔린 바다 위에 통통배의 연통이 하얀 무늬를 내뿜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흩날리며 배 안을 둘러보았다. 그를 포함해도 승객은 고작 셋, 두 사람은 보따리를 서너 개씩 짊어 맨 늙은 아주머니들이었다. 항구에 나왔던 어부의 아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섬은 생각보다 멀리 보이고 있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뱃길이라고 했으나 직선거리로는 수 킬로 이상인 듯했다.

형진은 잇달아 담뱃불을 붙였다. 한 개비를 더 태웠을 무렵 연락선이 섬에 하나밖에 없는 시멘트 방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선착장에는 서너 명의 노인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형진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땅에 내려서자 둑 건너편에서 그들보다 훨씬 젊은 또래의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점퍼 차림이긴 해도 맵시있게 은테 안경을 걸친 상대방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김형진 기자님이시죠?”

“네. 병원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닥터 최라고 부르십시오.”

서글서글한 인상의 닥터 최는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김형진은 악수를 나눈 뒤 한 바퀴 주위를 살폈다. 묘했다. 어쩐지 오래 전에 한 번쯤 와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궁도(宮島)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은테 안경의 의사가 그를 자동차로 안내했다. 섬 안은 의외로 널찍했고 선착장에는 아스팔트 도로까지 깔려 있었다.

“섬이 꽤 크군요.”

“그런 편입니다. 섬 주위만 돌아도 두어 시간 이상 걸리니까요.”

형진이 차에 오르자 핸들을 잡은 닥터 최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오늘은 이제 배가 끊겼습니다. 오전오후 두 번뿐이거든요. 그래서 하룻밤 묵으셔야 할 것 같길래 병원 안에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폐를 끼치네요.”

“천만에요. 이 섬 안에는 흔한 민박집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의사들도 아예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죠. 방은 넉넉하니 걱정 마십쇼.”

자동차가 바닷가를 끼고 언덕 하나를 넘었다. 선착장에서 쉬엄쉬엄 걸어도 족했을 그곳에 병원 입구가 커다란 간판과 함께 나타났다.

궁도 도립병원 - 얼핏 보면 학교 같은 건물들이 서너 채 늘어서 있었다. 형진은 입구에 쇠창살 달린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닥터 최가 눈치 챈 듯 씨익 웃었다.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다들 으스스한 곳은 아닙니다. 무슨 사람을 가둬 놓는 장소도 아니구요. 그리고 어차피 여긴 외딴 섬이기 때문에 배를 타지 않고는 도망갈 데도 없으니까요.”

외딴 섬. 그 말을 듣자 형진의 뇌리에 다시금 익숙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말도 안돼. 이건 꿈이야! 꿈이라구!”

그는 귀를 막은 채 고함쳤다. 그러나 기분 나쁜 목소리는 아랑곳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뭘 망설이나? 바깥 세상에는 너를 기다리는 벌레들이 있다. 수많은 벌레들의 몸뚱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우, 웃기지 마. 당신 누구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것이나 쥐어 들었지만 고작 해야 책과 볼펜 따위가 전부였다. 그래 봤자 상대는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가라. 네가 원하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가서 그 벌레들의 주인이 되어라.’

두꺼운 공책 하나가 문가를 향해 날아갔다. 쿵, 뒤이어 날아간 책이 텅 빈 벽에 부딪치며 산산이 책장을 흩날렸다. 목소리가 조롱했다.

‘아직도 고통을 원하는군.’

“안돼…… 안돼!”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악몽의 끝자락마다 어김없이 닥쳐 오는 순간이었다.

그는 방바닥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온 기운이 자신의 음경으로 뻗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랑이 사이가 벌떡벌떡 경련해댔다. 해면체를 타고 스멀거리는 감촉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제, 제발. 안돼!”

이윽고 타는 듯한 통증이 그의 사타구니를 엄습해 왔다. 불거진 힘줄들이 살 바깥으로 도려져 나오는 듯했다. 예리한 칼날이 사타구니를 난자하며 시뻘겋게 몰린 피가 요도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헐떡이며 교성을 질러대는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하얀 둔덕 사이로 벌어진 거무튀튀한 살결, 땀에 젖어 미끌거리는 나체가 눈앞에서 요분질을 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의 물건이 발기하고 있었다. 화장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책장들이 북북 찢겨졌다. 고통을 멈추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렇게 뜯어낸 종이쪽을 손에 들고 그는 허둥지둥 물건을 흔들며 자위행위를 시작했다. 몇 주 간의 악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고통을 가시게 하는 방법마저 가르쳐 줬기 때문이다.

사흘 전.

기자 김형진은 ‘주간 채널’의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널찍한 탁자 위는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피워댄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상석에서 거만하게 허리를 꼬고 있던 부장이 종이컵에 꽁초를 던져넣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수놓았던 밤거리의 인물들이라…… 괜찮은 기획이었어. 반응이 좋아.”

오늘 회의에서도 그가 꺼낸 화제는 역시나 가십이었다. 형진은 구석 자리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문화부라고 해서 언제나 제대로 된 문화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박인수 사건(50년대의 유명한 혼인빙자간음 사건)이 첫 회였고, 다음 차례는 뭐지? 7공자 사건(60년대 말 제비족 일제검거 사건) 아니면 정인숙 사건(1970년에 발생한 정치권 섹스 스캔들)인가?”

“아니오. 이성귀라는 인물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성귀? 그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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