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내의 늪
본문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이내 소나기가 되어, 신호를 기다리는 자가용 차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오는 걸까..."
토요일 저녁이라 약간의 교통체증을 느끼며 유진은 생각했다.
그녀의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또 고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남편, 그 부부에게 이번 여름은 힘든 계절이었다.
유진의 남편은 그녀보다 세 살 연상으로 현재 부사관으로 근무중이다.
중사.
어느덧 삼십대 후반을 지나고 하고 있건만, 그는 아직도 중사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결혼하기 전부터 달고 있던 그 계급장이 시간이 지날 수록 말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지난 봄 진급에서 다시 한 번 누락된 뒤라 올 여름의 이 부부는 더욱 힘이 들었다.
이제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것도, 애처로와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도, 피차... 고역이다.
"도대체..."
그녀는 남편에게 따지듯 묻곤 했다.
"당신 상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럴 때마다 남편은
"괜찮아. 죽기 전에는 진급하겠지, 뭐. 당신은 걱정하지 마. "
라고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유진도 할 수 없이 따라 웃곤 말지만, 말할 수 없이 그들이 야속하다.
명절 때마다.
갖은 경조사 때마다.
집안 식구들의 일보다 더욱 신경 써서 선물을 보내고 일손을 보태고 했건만.
돌아오는 거라고는 결국... 남편의 허탈한 웃음뿐이었다.
그렇게 애간장을 녹이던 남편의 상관에게서 뜻하지 않은 연락이 온 것은 그저께였다.
딸아이를 영어학원버스에 막 태우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장재홍 중령입니다. "
유진은 뜻밖의 전화에 적잖이 놀랐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계셨어요?"
한달에 한 번 정도는 남편과 함께 장중령과 저녁식사를 했던 터라 그와 그녀는 구면이었다.
"예∼ 덕분에. 혹시 배중사 관사에 있습니까? 핸드폰을 안 받네요."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쁜 목소리야. 라고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 지금 광주에 출장을 갔는데 마침 그 이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갔네요."
그녀는 일주일 짜리 타지역 영외근무를 간 걸 그의 상관이 왜 모를까 싶었다.
하지만 행여 이 말이 시비조로 들릴까 미처 물을 수는 없었다.
"아, 그래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그 이가 묶는 곳 전화번호는 알거든요. 제가 전해 드릴게요."
그러자 수화기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뭐, 별일은 아니구요. 같이 저녁이나 했으면 해서... 아쉽네요."
아쉽네요.
그것은 장중령이 할 말이 아니라 유진과 그의 남편이 할 말이었다.
"아, 이걸 어쩌죠... 남편은 다음주 화요일은 되야 온다던데..."
"할 수 없죠... 이번에 꼭 할 말도 있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뭐. 마침 보급대 윤중사가 시간이 빈다니까 그 친구랑 하면 되겠네요."
이것은... 투정이다.
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러면... 저라도 저녁식사를 모시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웃음 섞인 대답이 들려온다.
"허허헛... 어이구, 유진씨 같은 미인이면 저야 좋죠. 그럼 토요일 저녁 어떠세요?"
사실 그녀에게 그는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우선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말투 자체도 경박하기 그지없어서 도저히 영관급의 장교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작달막한 키에, 불룩한 배...
도대체 어디가 그녀의 남편보다 그가 나은 것인지 여자인 그녀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진이 그를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저녁식사자리를 꼭 술자리로 연결하고 그러면 반드시 자신에게 술을 따르게 했던 것이었다.
술을 마시며 유진이 무슨 안주거리라도 되는 냥 그녀의 외모에 대해 그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칭찬을 늘어놓아 유진은 늘 그 자리가 불편했다.
남편의 상관이라 싫은 내색을 할 순 없었지만 마치 자신을 핥는 듯한 정중령의 시선이 유진은 싫었다.
그런 그와 단둘이 저녁시간을 보내러 가는 것이다.
파란 신호로 바뀌자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자신이든, 남편이든 내년의 진급심사를 위해서는 그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엑셀을 밟았다.
약속장소인 한식집에 도착해보니 장중령은 아직 오지 않았다.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방에 들어가 앉았다.
따뜻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짐짓 긴장된 마음을 한풀 풀어준다.
유진은 화장을 고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남편이 결혼 10주년에 사준 투피스정장이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치마가 좀 짧은가..."
약간 짧다곤 생각했지만 앉아있으니 허벅지가 반 이상 드러나 보인다.
마치 엄마 옷을 훔쳐 입은 열다섯 소녀처럼 손끝으로 치맛단을 끌어내리며 다시 앉아본다.
"유진씨.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마누라가 아들놈 서울 자취집에 반찬 가져다주러 간다고 해서 터미널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라..."
유진은 일어서서 반갑게 맞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어요."
장재홍 중령과 유진은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시시콜콜한 일상사 얘기라 유진은 별 무리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재홍에 대한 경계 섞인 긴장이 조금 풀어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지난 봄... 진급 심사 말이죠..."
유진은 식사를 하다 맞은 편에 앉은 남편 상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거... 워낙에 대상자가 많아서 말이죠."
유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애원조로 말했다.
"다음 번엔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제 애 아버지 나이도 있고... 정말 부탁드립니다."
장중령의 입가에 슬핏 웃음기가 지나간다.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추천해야 할 중사가 한 둘이 아니라서... 허허."
유진은 몸을 식탁에 바싹 당겨 앉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장중령은 유진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한다.
"뭐... 유진씨 하는 거 봐서 제가 힘 좀 써 드릴 수도 있고..."
개새끼.
유진은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지만 눈으론 미소짓고 있었다.
"우선, 유진씨 술 한잔 받아볼까요?"
유진의 아버지는 무척 엄했다.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것 자체도 싫어했고, 더구나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건 작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가 보시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거야..."
장중령의 술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며 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커∼ 역시 술은 미인이 따르는 술이 최고라니까. 자, 자. 유진 씨도 한 잔 받으세요."
"아니에요. 저 술도 잘 못하고, 차도 가지고 와서..."
"어허. 참. 괜히 내숭 떨 필요 없어요. 그리고 대리운전은 괜히 있는 줄 알아? 자자∼ 한잔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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