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천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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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천사를 만났다. 장맛비에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사실이다. 나는 편의점에서 천사를 만났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칭 천사라고 주장하는 어떤 녀석을 만난 것이다.

그는 편의점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컵 라면을 빠개 먹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컵 라면을 빠개 먹고 있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냥 라면도 아닌 컵 라면을. 수프도 뿌리지 않고 그냥 라면만 부셔먹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이상한 행동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냥 모른 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물론이고 편의점 안에 있던 대여섯 명의 손님들 모두 그랬다.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녀석이었다. 머리는 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양쪽 귀를 모두 뚫었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귀걸이만 아홉 개였다. 손목에는 가죽 팔찌를 스무 개쯤 차고 있었고, 목에는 해골 모양의 앙크를 걸고 있었다. 사람이 포효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 프린팅된 붉은 박스 티에 갈기갈기 찢어진 헐렁한 힙합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약에 탐닉하고 있는 히피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빛은, 평생 햇볕이라곤 구경도 못 해본 사람처럼 새하얗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다. 어쨌든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물건 값을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계산을 하는 동안 그가 내 등뒤로 다가서 있는 느낌이 들어 나는 지갑이 든 뒷주머니를 손으로 힘껏 누르고 있었다.

"지갑 같은 건 훔치지 않아. 나한테 돈 따윈 무의미하니까."

그의 목소리에 놀라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계집애처럼 가는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서 있었다.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키가 컸다. 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뭡니까?"

나는 지그시 주먹에 힘을 모으며 몸을 긴장시켰다. 여차하면 한 방 먹여버릴 심산이었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냐 싶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원체 막가는 녀석들이 많은 세상 아닌가. 특히 이 녀석은 옷차림이나 생김새부터가 영 마음에 안 든다.

"나 소매치기 아니라구. 좀 전에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리고 옷차림은 급하게 오다보니까 되는 대로 대충 입어서 그래. 요즘 애들 사이에서 이런 복장이 유행이라며? 아니, 이미 한 물 간 패션인가?"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그런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 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계속 나를 따라왔다. 이런 엿 같은!

나는 뛰었다. 난 소매치기가 아니라 퍽치기야. 어느 순간 녀석이 둔기로 내 머리를 후려치며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달려서 집 앞 골목 어귀까지 도착한 뒤에야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가쁜 호흡을 추슬렀다. 눈을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녀석들은 상대방 입 냄새 같은 걸 가지고도 시비를 건다잖아.

"이 봐, 날도 더운데 왜 그렇게 뛰어? 이제 집에 다 온 거야?"

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녀석이 바로 내 곁에서 씨익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것이었다. 찜통 같은 날씬데도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야? 나한테서 뭘 원해?"

나는 들고 있던 비닐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먹을 올려 쥐었다. 잔뜩 긴장해 있는 나와는 달리 그는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근데 어떻게 따라온 거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원하는 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무슨 소리야? 난 당신한테서 원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

"그 부분에 대해선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우리 일단 뭘 좀 먹는 게 어때? 나 지금 배가 무지 고프거든? 나 밥 좀 사 줘."

뭐 이런 하이에나 같은 놈이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다음 순간 나는 그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한 분식집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딱히 그가 두렵다거나,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내가 어떤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때 그는 정말 배가 고파 보였고, 그에게 밥을 사 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뿐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분식집에서 그는 군만두 세 접시와 쫄면 두 그릇, 떡볶이 한 접시 그리고 비빔밥 한 그릇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가공할 만한 식욕이었다.

"아, 이제야 겨우 허기를 면했네. 생라면만 깨먹고 있으려니까 당최 뭔 맛이 나야 말이지. 이 집 음식 맛 괜찮은 거 같은데? 종종 이용해야겠어."

끄윽, 트림을 하며 그는 배를 두드렸다.

"도대체 얼마나 굶었길래 그렇게 많이 먹는 거야?"

"정확히 잘 모르겠어. 사람들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한 몇 만 년쯤 되려나? 더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입을 다물고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왜? 하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되받았다. 나는 으음,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혹시 살짝 맛이 간 거 아냐?"

"나 사람 아냐. 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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