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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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 꼭 가야 돼요?"

열린 욕실 문틈으로 초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온다. 거실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영후는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물소리 때문에 잘 듣지 못했다.

"뭐라고?"

"나도 꼭 가야만 되는 데냐구요!"

물소리가 그치고 이번엔 카랑카랑한 초희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린다. 영후는 다시 신문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부부 동반으로 오라잖아."

"그래도 난 왠지 안 내켜요."

"당신 바깥 나들이 한 지도 오래됐잖아. 이참에 바람도 쐴 겸 같이 가.“

"……"

초희의 대답을 샤워기의 물소리가 대신한다.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들 사이를 관류하고 있는 미묘한 긴장감을 대변해주고 있다. 초희는 여전히 시큰둥하다.

사진영상예술의 부흥이다 뭐다 해서 구호만 떠들썩했지, 모임이라고 나가봐야 집안 잔치에 불과했다. 매번 그랬다. 낯선 사람들 틈에 섞여 기계처럼 의미 없는 웃음을 지어야 하는 일도 이젠 지겨웠다. 사람들을 만나는 자체가 권태로울 뿐이었다.

샤워꼭지를 잠근 뒤 초희는 물기 어린 욕실 거울을 손으로 닦아낸다. 거울 속에 이슬에 씻긴 들꽃 같은 모습의 한 여자가 서 있다. 초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굳이 꽃으로 비유하자면, 그녀는 이름 없는 들꽃이 아니라 핏빛처럼 붉은 장미와 같은 여자였다. 농염한 향기를 내뿜으며 그 꽃잎이 벌어질 때면 제 아무리 강심장의 사내라도 여름 날 뙤약볕 아래의 눈사람처럼 힘없이 녹아 내리곤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 삼 년 동안 그녀의 꽃잎은 서서히 색을 바래고 요염하게 자신을 감싸주었던 가시 또한 하릴없이 무뎌져버렸다. 꽃이 만개하고 난 다음엔 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초희는 아직 김이 서려 있는 거울 귀퉁이에다 "아줌마"라고 썼다가 황급히 지워버리고 만다. 살아오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아줌마가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삼 년 전 그 아줌마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찬연히 빛나던 그 멍에를.

왠지 씁쓸한 기분에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러한 자탄 어린 한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유두의 색깔이 다소 짙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팽팽하게 물이 올라 있는 젖가슴과 25인치를 유지하고 있는 잘록한 허리, 그리고 허리 위로 바싹 올라붙어 있는 힙은 처녀 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잘 가꾸어 온 덕에 유지되고 있는 그녀의 매끈하고 탄력적인 피부는 아직도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무색하고 만들고 있다. 그리고 서른이 되려면 아직 일 년이나 남아 있지 않은가.

괜스레 처지는 기분을 애써 추스르며 그녀는 욕실 문을 나선다. 반바지 차림의 남편은 아직도 신문 기사에 넋이 빠져 있다. 뭐가 저리 재밌을까. 그는 초희가 곁으로 다가와 앉을 때까지도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영후씨!"

출렁, 소파의 진동을 느끼며 영후는 고개를 든다. 어느새 그녀는 영후의 허리를 껴안고 있다.

"어, 벌써 다 씻었어?"

"응, 당신은 안 씻어요?"

"시간도 넉넉한데 천천히 씻지 뭐."

그녀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베드 타월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몸에선 과일 향의 향긋한 바디 로션 냄새가 풍겨난다. 약간 틈이 벌어진 타월 사이로 날씬하게 뻗어 있는 그녀의 다리가 그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는 그녀가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직후의 이런 모습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가장 신초희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 속에 담겨지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가 누드다.

"당신 오늘 정말 예뻐 보여."

"정말?"

"응, 완벽해!"

초희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자신의 남편이긴 하지만 그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남자다. 깊고 그윽한 눈빛, 다소 고집스러워 보일 만큼 오뚝한 콧날, 그리고 완강하게 다물린 입술. 그것들이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의 얼굴은 잘 다듬어놓은 하나의 조각품을 연상케 한다.

결혼 전에 수많은 여자들이 그로 인해 몸을 달아했다는 사실을 초희는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배려하는 그의 다정다감한 기질이 여자들에게 섣부른 환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수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녀는 당당히 그를 쟁취했다. 프로포즈는 그가 먼저 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그녀의 승리였다.

"영후씨, 사랑해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그녀가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을 움푹 파고드는 깊은 공동(空洞)을 느낀다. 왠지 낯선 느낌.

"나도 사랑해."

나직이 깔리는 그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그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하릴없는 허전함이었다. 초희는 더욱 더 세차게 그를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킨다.

"여보, 답답해."

영후는 초희의 몸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의 필사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완강한 태도였다.

"초희야……"

"그냥 이렇게 잠시만 안고 있어요, 자기. 잠시만……"

왠지 사무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영후는 스르르 몸에 힘을 뺀다. 후끈한 열기 같은 것이 그녀의 몸에서 느껴진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변함없이 뜨거운 여자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그걸 잊은 적이 없었다.

연애 시절, 과감한 노팬티 차림으로 그를 먼저 유혹한 것도 그녀였다. 그의 세련된 매너가 외려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그가 좀더 과감하게 대시해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평행선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를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몸을 던져 그를 포획한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은 가히 그녀가 그를 겁탈했다고 해도 무방한 사건이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프로 정신을 지니고 있던 그였지만 열정적인 육탄 공세로 자신을 유혹해오는 그녀를 그대로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가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세상을 한 손에 쥔 듯한 희열을 맛보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주요해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가 결혼 후까지도 그녀를 다소 사무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대한다는 점이었다. 잠자리에서의 그의 모습은 더욱 그랬다.

젊고 열정적인 그녀는 그가 보다 적극적이고 와일드하게 자신을 정복해주길 원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끓어오르는 욕망에 허덕이는 쪽은 그녀였고 그는 그러한 그녀의 욕구에 외려 무심한 편이었다.

들끓는 정염을 미처 불사르기도 전에 그는 힘없이 나가 떨어져 코를 골기가 일쑤였고 그녀는 미처 채우지 못한 미진함을 홀로 달래야만 했다. 그렇게 지내온 삼 년이었다.

이제 그녀는 무언가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밤마다 구걸하듯 그에게 손을 벌리는 것도 이젠 지쳤다. 그녀에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그녀로서도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자신의 속내에서 색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아련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을 안을 때 느껴졌던 "비어 있음"의 감정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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