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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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명월관.

유메

“넌 좋겠다. 저렇게 매일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유메의 비아냥에 미유키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메

“너도 참 웃기다 얘. 일본 총독 아드님께서 매일 친히 행차하시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단해.”

유메는 한복 옷고름을 고쳐 매며 미유키를 지나쳐갔다.

히로토

“아직 안 끝났습니까?”

유메가 자리를 뜨자, 히로토는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미유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미유키

“네.”

히로토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미유키

“늦을 거예요. 기다리지 마세요.”

히로토

“나랑 밥 한번 같이 먹는 것도 싫습니까?”

미유키

“……”

히로토의 물음에 미유키는 침묵으로 답했다.

히로토

“그럼 차 한잔하죠. 기다리겠습니다.”

히로토는 일 보라는 듯 미유키에게 눈짓했다.

미유키

“…. 후우….”

끈질긴 히로토의 애정공세에 미유키는 한숨만 나왔다.

미유키에게 히로토는 그저 수많은 손님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에게 특별한 것이라면 그저 일본 총독의 아들이라는 신분뿐.

미유키에게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었다. 히로토는.

아, 그리고 일본 총독의 아들이라서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싫어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매일 명월관을 찾아와 미유키를 지켜보고 집 가는 길목까지 조용히 따라왔다.

그의 행동이 싫었지만, 그 더러운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그를 내치지 못했다.

료스케

“또 온 겁니까? 저분.”

미유키

“응? 응 또 오셨네.”

료스케

“제가 좀 가서 말해볼까요? 남자 대 남자로 말하면…”

미유키

“저분 일본 총독 아드님이라고 내가 말했잖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는 료스케를 미유키가 조용히 타일렀다.

료스케

“그럼 끝나고 나랑 같이 갑시다. 데려다줄 테니.”

미유키

“오늘 내가 한번 말해볼까 해. 차 한 잔 마시면서.”

미유키는 저쪽에서 자신에게 눈길을 떼지 않는 히로토를 흘끗 쳐다보며 다짐했다.

히로토

“영광이네요, 이렇게 마주 앉아 있다니.”

미유키

“영광…. 이라니요. 일본 총독 아드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미유키는 조용히 앞에 놓인 차 한 모금을 마셨다.

히로토

“미유키 씨. 나랑 혼인합시다.”

다짜고짜 혼인을 들먹이는 히로토의 말에 미유키는 하마터면 입안에 든 차를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내뱉을 뻔했다.

미유키

“뭐…. 뭘 하자고 하신 거예요. 지금?”

히로토

“혼인이라고 했습니다.”

미유키

“제가 웃음이나 팔고 다니는 기생이라 쉬워 보이십니까?”

히로토

“많이 좋아합니다. 미유키 씨.”

미유키

“전 좋아하지 않아요. 히로토 씨를.”

미유키는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표했다.

히로토

“제가 싫습니까?”

미유키

“……”

히로토의 물음에 차마 미유키는 싫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 놓지 못했다.

자신이 말했다시피 히로토는 일본 총독 하세가와 가문의 장남이었으니까.

히로토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하니까.”

히로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유키

“혼인은 서로 연모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겁니다. 전 히로토 씨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혼인을…”

히로토

“좋아하게 만들면 됩니다.”

미유키

“…예?”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히로토의 표정에 미유키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히로토

“좋아하게 만들 겁니다. 내가.”

***

재욱

“….주야!! 유주야!!”

유주

“허억…. 헉…”

의사

“차유주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들리면 고개 한 번만 끄덕여 주세요.”

의사의 말에 유주는 비몽 사몽 간에도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의사

“일단 의식은 돌아온 것 같네요.”

재욱

“감사합니다. 선생님.”

유주

“…여기가 어디…”

재욱

“여기 병원이야.”

유주

“병원…?”

병원이라는 말에 유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재욱

“나…. 알아보겠어?”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낯선 얼굴에 유주는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재욱

“유주야.”

유주

“내 이름이 유주예요?”

낯선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유주에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재욱

“차…. 유주…”

유주

“그럼…. 그쪽은 누구…”

재욱

“유주야 나…당신 남편…이잖아.”

유주

“…. 남…편이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유주는 순간 좀 전의 꿈속에 나온 남자와 겹쳐져 두 눈을 비볐다.

재욱

“한재욱, 당신 남편.”

유주

“남편…. 이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유주는 또르르 눈동자를 굴려 재욱의 옆에 서 있는 의사에게 시선을 두었다.

유주의 시선에 조금 당황한 듯한 의사는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차트를 휙휙 몇 장 넘기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사

“아무래도, 사고로 기억을…”

재욱

“기억 상실증 뭐 이런 겁니까?”

의사

“네 제 소견으론 사고 충격으로 일시적인 기억 상실인 것 같습니다.”

재욱

“아, 예 그렇군요. 이만 나가보세요.”

의사

“아…. 네.”

의사가 나가고 재욱은 자신을 낯선 사람 보듯 바라보는 유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아주 조심스럽고도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재욱

“내 이름은 한재욱이고, 유주, 아니 유주 씨 남편이에요. 나이는 34살, 직업은 YJ 엔터테이먼트 이사. 우리는 저번 주에 결혼했어요….”

재욱은 왼쪽 손을 들어 보이며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었다.

유주는 재욱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한번 보다가 자연스레 자신의 왼쪽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주의 왼손 약지에도 재욱의 약지에 끼워진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유주

“아…”

재욱

“그리고 당신 이름은 차유주고 나이는 26살이에요. 직업은 배우고.”

유주

“배우요? 제가요…?”

자신이 배우라니, 유주는 혼란스러운 듯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재욱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유주

“….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자신의 이름까지도. 그런데 눈 뜨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남편이라니….

이 상황이 아득한 꿈만 같은 기분에 유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혹시나 눈을 다시 뜨면 모두 꿈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

료스케

“저 사람 또 기다리는데요, 이제 어찌할 겁니까.”

미유키

“말을 해도 안 듣는데 내가 어찌해야 하니.”

미유키의 한숨 섞인 한탄에 료스케가 벌떡 일어나 히로토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미유키

“료…. 료스케!”

미유키가 료스케의 옷깃을 잡기도 전에 료스케는 이미 씩씩거리며 히로토의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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