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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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세요~."

아침을 알리는 혜린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창석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천장에 붙은 혜린의 사진에 미소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원룸에서, 매일을 이렇게 혼자 기상했지만 상관은 없었다.

30년을 그렇게, 누구한테 관심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창석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히히-. 우리 혜린이 잘잤어?"

창석은 밤새 껴안고 잤던, 혜린의 실물 크기 사진이 찍혀있는 대형 베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혜린은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아이구~. 우리 혜린이, 무서운 꿈 꿨어요~? 괜찮아. 괜찮아."

베개를 토닥이는 창석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시 혜린을 달래주고는,

쪽-

그 살짝 내민 입술에 모닝키스를 해준 창석은,

"흐으으음~ 흐으음~."

그녀가 모델인 광고의 CM송을 흥얼거리며,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남들이 아무리 돼지라고 놀려대도,

남들이 아무리 짜증난다 손가락질 해대도,

창석의 아침은 즐겁기만 했다.

운명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처럼 같은 시간에 올라탄 지하철은 사람들이 붐볐고,

역시나 같은 시간에 도착한 회사 입구는 분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출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헤헤-."

누구 하나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인사를 소심하게 날리며, 창석은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늘상 하던 업무를 보는 그의 일상을 바꿔버릴 전화가 울린 시각은 9시 43분이었다.

"네. 관리부 한창석입니다......아, 박과장님은 오늘 연차내셨는데요......네? 근데 제가 그건 해본적이 없어서.....

아니 알긴 아는데요.......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창석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어쩌지, 나 사장님실은 한번도 안가봤는데....

이 회사 입사한지가 벌써 3년째였지만, 창석은 단체모임에서나 몇 번 봤을뿐,

사장과 독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사실 이 회사에서 창석이 제대로 관계를 가져본 사람은, 부모님과의 인연으로 자신을 회사에 꽂아준

이부장 밖에 없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창석은 회사안에서 섬과도 같았다.

덩치만 큰 돼지 몸매에, 어떤 각도에서도 구토를 유발시키는 여드름인지 뭔지가 한가득 난 못난 얼굴은,

학교에서 뿐만아니라 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재수없어."

"뭐랄까? 딱 보면 변태같이 생겼잖아."

"어우~. 저 뱃살 좀 봐. 저건 그냥 게으른거야. 더럽고 나쁜거라고."

더군다나 이상하리만큼 여직원 비율이 높은 관리부에서, 창석은 더더욱 외로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띵동-"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창석은 사장실로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죠?"

딱 봐도 외모로 뽑혔다는 걸 알 수 있을만한 젊은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관리부 한창석입니다. 사장님께서 찾으셔서...."

비서 이소연

깔끔한 투피스 정장 차림의 그녀 이름이 책상 앞 명패에 써있었다.

아~. 사람들이 말하던 소연이 이 사람이구나.

남자 화장실과 휴게실에서 종종 듣던 이름이었다.

왜 그렇게 그녀 이름이 남자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는지 창석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힐을 감안하더라도 170이 살짝 넘어 보이는 시원한 키에,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를 팽팽하게 만들고 있는 볼륨감이,

잘빠진 모델을 연상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예쁘긴 예쁘다. 저런 머리도 잘 어울리고.

스튜어디스처럼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로 드러난, 소연의 반듯한 이마를 쳐다보며 창석은 생각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사장님께서 지금 통화중이십니다."

"아, 네."

소연의 말에 창석은 대기용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창석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쩔수 없는 남자의 본능으로, 힐끔 힐끔 소연을 훔쳐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아이~씨. 찐따같은 새끼가 힐끔 거리기는.

그런 창석의 어색한 시선을 소연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생긴 것도 꼭 변태 같은게, 저 새끼 혹시 더러운 상상하고 있는거 아냐?

꿈에서라도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역겨운 돼지새끼의 상상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을 생각을 하니,

소연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물론 창석이 딱히 이상한 상상 같은 걸 한 건 아니다.

처음 와보는 사장실 앞에서 잔뜩 긴장한 그는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다.

어휴~. 저 얼굴 좀 봐. 무슨 소보로빵도 아니고....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소연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볼일이 급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창석을 덜 보기 위한 방편이었다.

몸에 밴듯한 교태로움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소연의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에 색기가 묻어 나왔다.

얼핏 보기에는 단정하고 도도한 비서였지만, 그 속에는 타고난 음란함이 숨어있는 듯도 한 그녀였다.

와~. 저 다리 좀 봐.

커피색 스타킹으로 감싸진 쭉 뻗은 소연의 매끈한 다리에 창석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창석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법한 소연의 몸매였지만,

문제는 그 감탄사에 창석의 서류철이 그만 바닥에 떨어졌다는데 있었다.

탁-

하고 떨어진 서류철을 줍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창석은 허리를 숙였고, 바로 그 때,

"어머!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날카로운 소연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창석은, 바보같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지금, 제 치마 속 보신거 맞죠? 아니 뭐 이런 변태 같은 사람이 다있어. 진짜."

조금전 부터 창석이 불쾌했던 소연은 점점 더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전 그게 아니라 그냥 서류철이 떨어져서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히히-."

사람좋은 창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연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 특유의 바보같은 웃음은 소연의 화를 더욱 더 키우는 역효과를 발휘하고 말았다.

이 변태 같은 새끼가 실실 웃어? 아~ 진짜. 너 이 새끼 오늘 한 번 혼 좀 나봐라. 흥!

소연은 그냥 거기서 끝냈어야만 했다.

아무리 창석이 역겹고 꼴보기 싫었더라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됐었다.

그러나 소연은 결국,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되리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꺄아악~.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어딜 만져요?"

소연은 갑자기 몸을 웅크려 앉으며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네? 아,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을...."

그제서야 당황한 듯 창석의 표정도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네?"

소연의 비명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급기야 사장까지도 사장실 문을 열며 나왔다.

"응? 미스리 무슨 일이야. 왜?"

"사장님~. 흑흑흑. 아니 글쎄 제가 화장실 가려는데 저 분이 막. 흑흑흑-."

딱히 잘난거 없는 자신이 비서로 뽑힌 이유와, 평소 끈적하던 사장의 눈길을 알고 있는 소연은

기가막힌 연기를 선보이며, 사장 옆에 찰싹 달라 붙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제, 제가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부르셔서 이제, 박과장님이 연차라 제가 왔는데,

통화중이시라 기다리다가, 서류철이 떨어져서....."

눈앞이 하얘지며 창석은 뭐라뭐라 이야기들을 나열해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범죄 현장을 들킨 변태의 횡설수설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 이거. 이부장 면목도 있고, 그래도 마음 하나는 착한가 보다 해서 내버려두고 있었드만,

아주 저질이구만. 저질."

달래주는 척 은근슬쩍 소연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며 사장은 창석을 마구 닥달해댔다.

자기는 쳐다보는 것도 죽을 죄이고,

누구는 엉덩이를 두들겨도 괜찮은 건가?

창석은 뭔가가 울컥하며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래, 어쩐지. 내 저인간 언제 한 번 저렇게 될 줄 알았어."

"왜 저번에 관리부 미스최도 나한테 그랬다니까. 저 인간이 틈만 나면 툭툭 건드린다고."

"저봐 저봐. 생긴거 부터가 딱 그러게 생겼잖아. 어유~. 더러워 진짜."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온갖 욕설과 비난 속에서 창석은 조금씩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래, 그냥 조금 힐끔 힐끔 보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까지 돌팔매질을 당한 일이던가?

나 같은 놈은 눈조차 함부로 들고 다니면 안되는 거였던가?

창석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었던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긴 말 필요 없고. 오늘부로 당장 회사 때려쳐! 나는 그런꼴 절대 못보는 사람이야! 어디 회사망신을 다 시키고

말이야."

여전히 소연을 옆에 딱 낀채 사장은 보란듯이 사장으로서의 위엄을 내보였다.

그것은 마치 탐나는 암컷 옆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때려 눕히는 수컷의 모습이었다.

"흑흑흑. 사장님 이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사장님. 흑흑흑."

소연의 연기는 더욱 더 짙어졌고,

"맞습니다. 사장님. 이런 사람은 한 번 본보기를 보여야 회사의 기강도 바로 서고....."

주변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안돼. 경찰서라니. 그것만은 절대 안돼.

회사를 잘리는 것도 모자라서 경찰 이야기까지 나오자, 창석은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창석은 대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한채, 초라하고 굴욕적이게 그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아이고~. 이 사람이!"

그 순간 사정 이야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이부장이 사람들을 뚫고 창석의 옆에 다가왔다.

"아니, 이사람아. 어쩌자고 그랬어. 아이 참....."

그나마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이부장만큼은 창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저, 사장님. 이 친구가 정말 잘못을 하긴 했습니다만,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한 번 할 수 있고,

저 어떻게 회사안에서 마무리 짓는 걸로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부장은 반쯤 벗겨진 머리를 조아리며 사장에게 사정을 했다.

"아, 피해자는 내가 아니라 미스리인데, 미스리 생각을 따라야지. 내가 뭐 힘이 있나. 허험."

사장은 은근슬쩍 이부장의 시선을 회피했고,

"저 소연씨. 소연씨가 이번 한번은 좀 참아줘요. 아, 이친구가 원래 천성이 참 착한데 소연씨가 정말 예뻐서,

그런 실수를 했나봅니다. 어떻게 내 체면을 좀 봐서라도....."

자기 나이의 절반도 안되는 새까만 후배 여직원에게 존대까지 해가며 굽신거리는 이부장의 모습에,

창석은 온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 죄가 없는데.

왜 나와 나를 변호해주는 이부장님이 이렇게까지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창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휴-. 뭐 부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경찰에 신고까지는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 사람 얼굴 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

결국 이부장의 눈물겨운 사정끝에 일은 거기서 마무리가 되었고,

한때는 그래도 회사동료였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속에 창석은 짐을 꾸렸다.

억울하다 호소를 더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이미 자신은 경찰한테 안붙들려 가는 것만도 다행인 완벽한 현행범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변태새끼.

더러운 놈.

천하의 개자식.

책상을 정리하는 창석의 귀에, 자신을 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장실에 올라간거?

아니면 박과장이 하필 연차를 낸거?

그도 아니면 이 회사에 취직한 거?

아니,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은 태어난 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그저 조금 모자라고 못났을 뿐인데,

세상에겐 그 조금이 커다란 잘못이었다.

"엉엉엉~."

정말 애처럼 서럽게 울면서, 창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세린을 끌어안고 침대에 파묻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울다가 울다가, 창석은,

자신의 삼십 평생을 그대로 복습하고 곱씹으며, 그 억울했던 하루하루를 되새겼다.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못생겼다 놀림받던 아이,

자신의 사랑고백이 역겹다며 두말 없이 찢겨지는 편지를 바라보던 소년.

미팅 한 번 껴달라는 말도 못 꺼내보고 주변만 배회하던 대학생.

되지새끼같은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며 매일같이 얼차려를 받았던 군인.

면접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불쾌한 시선에 가슴 아파하던 취업준비생.

그의 슬픔이 조금씩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 필요없다.

세상이 나를 원치 않는다면, 나도 세상을 원치 않는다.

"세린아. 너는 내 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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