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본문
쏴아아아아-
아득히 먼 곳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감은 눈을 뜨고, 창틈으로 흘러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등 뒤로 작은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몸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띵하고, 속이 매슥거렸다. 내가 언제 어떻게 방에 와서 잠이 들었더라?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지금도 술이 깨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8시 5분]
출근 시간까지 15분 남았다.
나는 바닥에서 몸을 뜯어내듯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급히 구한 이 집은 비록 반지하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통풍도 잘 되고, 채광도 좋은 편이라 거의 지상에 있는 집과 다를 게 없었다.
벽지와 장판도 모두 새것이라 집에 몸을 비빌 때의 느낌도 좋았다.
단 하나만 뺀다면.
쏴아아아아-
나는 좀비처럼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따라 빗소리는 유난히 귀에 익었다. 기지개를 크게 펴고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엇?!”
화장실 안의 풍경을 본 나는 움찔 얼어버렸다.
웬 여자가 샤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뽀송뽀송한 피부와 봉긋 솟은 가슴,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허리의 곡선, 탱탱하게 부풀어있는 엉덩이와 길게 뻗은 다리, 물이 떨어지는 그 살결 위로 폭신폭신한 비누거품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빗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샤워기의 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잠시 멈춰선 사이, 화장실 안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꺄아아아악!!!!”
그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세면대에 있던 물건들을 죄다 나에게 던졌다.
칫솔, 면도기, 폼 클랜저와 샤워 타월까지.
온갖 물건들이 나의 얼굴에 날아와 부딪혔다. 그중에 가장 아픈 것은 양치용 컵이었다.
퍽-
묵직한 유리컵이 이마에 정통으로 날아와 박히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만큼 아찔했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야만 화장실 안에 있는 난폭한 생물에게 더 이상 공격을 받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쿵쾅-
쾅쾅쾅-
“야 이 변태야!!! 어딜 들어와!!?”
그녀는 당장이라도 화장실 문을 부술 것처럼 사납게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지금은 화요일 아침 8시 5분. 우리 집이 확실하다.
어젯밤 나는 분명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왔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여자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화장실 문이 열리며 수건으로 몸을 가린 그녀가 나왔다. 그리고 잔뜩 화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최대리 미쳤어요?! 안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면 노크를 하고 들어와야 할 거 아니에요?!”
최대리?
나를 알고 있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고 동그란 눈과 하얀 얼굴. 얇고 붉은 입술과 붉게 달아오른 두 뺨.
잔뜩 화가 난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나는 비로소 간밤의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녀였다. 이 집. 13평 남직한 반지하의 집에서 두 개의 방을 나와 나눠 쓰고 있는 여자.
임효진 대리.
모든 상황을 비로소 이해한 나는 그녀를 향해 반격을 시작했다.
“아니, 문도 안 잠그고 샤워한 사람이 문제지 왜 물건을 던지고 난리에요?”
“어머, 내가 잘못했다고? 지금 제정신이에요?”
임대리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순간, 나는 움찔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맞섰다.
“밖에 비도 오고 그래서 샤워기 소리랑 빗소리랑 좀 헷갈릴 수도 있지, 뭘 대단한 걸 보여줬다고 야단법석이래? 이마에 양치 컵 맞아봤어요?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더 아픈 게 뭔지 보여줄까요?!”
임대리의 눈이 살기를 뿜어내는가 싶더니,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녀의 매서운 손바닥에 나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귓가에서 폭죽이 터진 것처럼 강렬한 느낌이 감각을 때리고 갔다.
쾅-
뜻밖의 습격에 내가 비틀거리는 사이, 그녀는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성난 그녀의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그리고 술 먹고 들어오려면 얌전히 들어와요! 한 번만 더 새벽 늦게 나 깨우면 그땐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아요!”
“깨우긴 내가 당신을 언제 깨웠다고 난리야?!”
욱하는 기분에 나도 똑같이 소리를 질러보았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크고 동그란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움찔 놀란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경고를 던졌다.
“그리고 밥 먹었으면 바로바로 설거지해놔요. 어제도 내가 그릇 다 씻었으니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았다. 그릇과 냄비가 깔끔하게 씻겨져 있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담가 두면 내가 알아서 씻는다니까.”
“2주째 그릇이 쌓여 있는데 어떻게 그냥 담가 둬요?!”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나는 엄마에게 혼이 난 사춘기의 중학생 남자아이처럼 터덜터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서서 흐르는 물로 세수하고 거울을 봤다.
짙은 다크 써클이 뺨까지 내려올 것 같았다.
면도하고 머리를 감는 사이, 문득 화장실 한구석에 있는 검은 색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의 속옷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실크 재질의 팬티를 집어든 나는, 임대리에게 가져다 줄까말까 망설이다가 씨익 웃고 말았다. 팬티를 입은 그녀의 알몸을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효진 대리는 그래도 여자로서 꽤 괜찮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가슴도 적당히 볼륨이 있었고, 허리나 힙 라인도 제법 관리를 하는 편이었다.
얼굴도 둥글고 귀염성이 있는 편이라 불같은 성질머리만 아니라면 한 번쯤 눈길을 돌려볼만한 타입이었다.
피부도 30대 초반답지 않게 탱탱하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끼익-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팬티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화장실 문이 열리며 임대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혹시 내 팬티 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