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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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들어서자 날씨는 제법 쌀쌀해졌다. 강준은 막히는 퇴근 시간을 피해 야근을 하고 8시가 좀 지나서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된 차를 향해 걸으며, 건물 안임에도 한기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고급 세단에 앉아 늘상 듣던 피아노 연주곡을 켜고 안전벨트를 맨 후,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번잡함을 싫어하는 강준은 오롯이 홀로, 운전하며 성능 좋은 카 오디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반짝이는 도심의 가로등과 네온사인을 뚫고 차를 운전해 가노라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리는 기분이랄까. 오늘 하루도 수고한 자신을 응원해주는 느낌을 받곤 했다.
때문인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딱히 목적지도 없이 차를 운전해 달리곤 했다. 그렇게 얼마간 차를 달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나면, 옥죄고 있던 긴장감과 스트레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사무실과 집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어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준이 사는 고급 주택가에 다다랐다.
집 앞대문 옆으로 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려는데, 차고 앞 한편에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누구야 이 밤에 남의 집 앞에”
클랙슨을 울리려다, 이 밤에 그것도 시끄러울 것 같았다. 차가 서 있으니 기척을 느껴 비키겠지. 얼마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마치 스스로를 안아주기라도 하는 듯 등을 한껏 굽혀 쪼그리고 있다가, 뒤에서 비춰오는 강준의 헤드라이트 빛을 느꼈는지, 굽혔던 등을 펴고는 강준의 자동차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골목 반대편 길가에 다시 쪼그리고 앉아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얼핏 보아도 앳된 얼굴이 10대의 소녀였다.
언제부터 여기서 저렇게 있었을까.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점퍼도 하나 입지 않고 티셔츠 하나만 입고 쪼그려 앉아있는 모습이 강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추울 텐데.
차를 주차장 안으로 넣으려다 말고 강준은 차에서 내려서 뚜벅뚜벅 소녀에게 걸어갔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강준이지만, 이 밤 이런 날씨에 홑겹 옷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소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춥지 않아?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
강준의 말에도 소녀는 꼼짝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저리 가라는 의미.
알지도 못하는 어른의 참견 따윈 받고 싶지 않단 소리겠지. 딱히 안면이 있는 아이도 아니니 다시 차에 오르려 시선을 발길을 돌리려는데, 소녀의 발에 시선이 멈춘다.
한 발에는 운동화, 한 발에는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에 슬리퍼가 신겨져 있다. 제대로 짝도 못 맞춰 신고 나온 걸 보면, 이 아이 무척이나 급하게 나온 모양이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이 시간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나와, 어두운 골목 어귀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이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얼마나 여기 이러고 있었던 거지. 이 날씨에 금세 몸이 얼었을 텐데.
오지랖 넓은 참견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이라도 붙여봐야겠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나.
“아저씨가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해서 말야.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혹시 괜찮으면 아저씨랑 같이 가서 저녁 좀 먹어줄래? 따뜻한 우동이 먹고 싶은데.”
"....."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추워 보이는 이 아이에게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이라도 먹여 추위를 녹여주고 싶었다. 그리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진 않았지만, 이런 10대를 대해본 적 없는 강준으로선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강준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소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때 휘힝~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스산한 소리를 냈다. 발 시릴 텐데… 그렇다고 더 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자칫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강준의 말에 전혀 반응 없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준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을 등진 소녀의 말간 얼굴이 강준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건지,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소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강준을 바라봤다.
“전 우동 안 먹고, 돈가스… 먹어도 돼요?”
앳된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청아하고 영롱했다. 그 소리가 너무나 맑아서, 자꾸만 말을 시켜 다시 듣고 싶을 정도로.
“어? 뭐… 그래… 돈가스가 좋으면 그것도 먹어.”
뜻밖의 천진한 질문에 강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럼 아저씨 차 타고 가자. 아저씨가 일하고 왔더니 피곤해서 말야. 아저씨 나쁜 사람 아냐. 이 집에 사는 사람이야.”
먼 거리가 아니기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도 됐지만, 추위에 떨었을 소녀를 좀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행여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라도 할까, 강준은 여기가 제집임을 강조하면서.
소녀는 대답 대신 말간 얼굴로 강준을 쳐다보며,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그럼 일어날까”
강준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자, 소녀가 강준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제힘으로 일어서서는, 강준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
내민 손이 무안해진 강준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소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 차 타면 되죠?”
“그래.”
강준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자, 소녀가 차에 올랐다.
차 문을 닫아주고, 강준은 차 뒤로 가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뒤적여 찾더니, 이내 운전석 쪽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
“이걸로 갈아 신을래? 좀 크긴 하겠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네”
강준의 손에는 하얀 런닝화와 새 양말 한 켤레가 들려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곧잘 한강 둔치를 달리기를 좋아해 차에는 항상 운동화와 트레이닝복과 양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준이 내민 운동화를 빤히 쳐다보는 소녀의 얼굴에 순간, 여러 가지 표정이 지나간다.
“이거 비싼 건데… 우리 반 친구가 언젠가 신고 와서 자랑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값비싼 유명 수입 브랜드 런닝화를 본 소녀가 신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러워지면 어떡해요. 전 그냥 이렇게 신고 갈게요”
하다가, 짝도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는 제 발을 내려다보고는, 소녀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올라와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 발보다, 내 신발이 더 냄새날 거 같은데. 그거 사실은 한 달 넘게 안 빨았거든. 왜 냄새날까 봐 신기 싫어?”
그럴 리 없는 새것처럼 깨끗한 운동화를 가리키며 강준이 물어오자, 소녀는 손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냄새 나도 참고 신어봐. 양말은 그래도 새거다?!”